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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필라테스의 역사
그동안 무용계에만 알려져 있던 필라테스(Pilates)는 1980년대 중반부터 무용계 외에도 알려지기 시작하여 최근 10년 동안에 급속히 대중화 된 것입니다.
1. 조제프 휴벌터스 필라테스(Joseph Hubertus Pilates,1880년 ~ 1967년)
조제프는 1880년에 독일 뒤셀도르프(Dusseldorf)에서 출생하였으며 1967년에 미국 뉴욕에서 타계하였습니다.
산업혁명은 인류에게 인구밀집과 좌업생활양식 이라는 변화를 가져다주었고, 결과적으로 전염병 및 유아사망률의 증가 등 건강의 전반적인 쇠퇴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조제프는 유년시절에 구류병, 천식, 류머티스열 등으로 병약한 아이였으며, 한때 결핵에 걸릴까 염려되었던 이 아이는 건강을 위해 당시 성행하던 건강운동과 온천욕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는 항생제와 같은 효능성 약물 및 현대의학의 구명법이 출현하기 전이었기에 질병에 대항하며 살아가는 방법이란 건강하고 튼튼한 몸을 유지하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운동하는 것이었으며, 또한 체조(gymnastics)의 발전으로 건강운동법이 독일 대중에게 점점 소개되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건강운동은 당시 유럽인들에게 일상화 되어가던 건강법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체조는 19세기 초 독일인 프리드리히 루드비히 얀(Friedrich Ludwig Jahn)에 의하여 현대체조로 발전되었습니다. 얀이 개발한 독일식 체조는 처음에는 실외운동 프로그램으로 시작하였으나 나중에는 그가 고안한 기구를 이용하는 실내운동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 독일식 체조의 목적은 우선적으로 남성의 체력을 개선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얀은 대학에서 전공한 신학, 역사학, 철학을 바탕으로 ‘체력은 국가의 자랑이자 국민의 복지’ 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즈음에 스웨덴에서는 퍼 헨릭 링(Pehr Henrik Ling)에 의하여 동작의 리듬과 유동성이 강조된 스웨덴식 체조(Gymnastik)가 발전되고 있었습니다. (스웨덴식 체조는 미국에서 미용체조로 불려지게 됩니다.) 이 스웨덴식 체조의 목적은 우선적으로 여성의 미용을 개선시키는 것이었습니다.
19세기 말부터는 근력, 지구력, 유연성, 협응성을 개선시키는 운동법으로 발전되면서 심혈관계의 기능을 협응된 호흡으로 일정하게 제어하여 인체의 전반적인 건강을 증진하는데 목적을 두게 되었습니다. 위 두 형태의 체조는 매우 대중화되면서 한 세기가 바뀌기도 전에 독일의 많은 학교에서 정식 교육과정으로 채택 되었습니다. 1896년에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제1회 근대 올림픽 경기에 체조가 채택됨으로써, 체조는 의심할 여지없이 붐을 조성하게 되었습니다.
조제프는 운동을 매우 열심히 하여 자신의 체력을 향상시키고 육체미를 조형하였으며 14세 때에는 해부학도해의 모델을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체조, 다이빙, 스키 등을 즐기며 10대의 나이를 보냈습니다.
조제프는 20대에 직업으로 결국 권투선수와 호신술강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운동계에서 종사하면서 요가, 가라데, 선명상, 고대 그리스 및 로마의 운동법에도 관심을 갖고 접하였습니다.
조제프는 1912년(32세)에 영국으로 이주하여 권투선수, 호신술강사, 서커스단원 등의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제1차 세계대전(1914년 7월 28일~1918년 11월 11일)이 발발하면서, 적성국가의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랭커스터(Lancaster)에서 강제수용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수용소 안에서 건강과 육체미 조형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였고, 호흡을 이용한 일련의 매트운동을 기초로 건강회복 프로그램을 고안하여 수용자들을 동참시켰습니다. 경이적인 결과로서, 독감이 유행하여 전쟁기간에 사망했던 사람들보다 수천 명의 더 많은 사람들이 독감으로 죽어나갔지만 건강회복프로그램에 동참했던 사람들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조제프는 전쟁이 끝나갈 즈음에 맨섬(Isle of Man)으로 이송되어 전쟁 부상자들을 위한 재활에 참여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간이침대의 스프링으로 각 침대의 끝을 연결한 후 그것을 운동저항으로 하여 환자에게 운동하게 하였는데, 이러한 기구가 근육의 긴장상태를 빨리 회복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후에 그가 다양한 스프링과 걸이봉(hanging bar) 등을 갖춘 침대기구인 캐딜락(또는 트래피즈 또는 트랩 테이블)과 스프링이 달린 활주대(sliding platform) 위에서 눕거나 앉거나 서서 운동 할 수 있는 침대기구인 유니버셜 리포머(universal reformer)를 고안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제프는 연구를 계속하여 침대에 다양한 장치들을 추가로 설치하였고, 매트운동도 추가로 고안하였습니다.
조제프는 전쟁이 끝난 후 독일의 함부르크(Hamburg)로 귀향하여 그 동안 자신이 고안한 운동법과 기구를 정리하였습니다.
이즈음에 조제프는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무보법과 라반무보법의 창시자 루돌프 폰 라반(Rudolph von Laban)과 교류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필라테스가 무용계에 처음 소개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후에 무용계는 필라테스가 결실을 맺는 분야가 되었습니다.
또한 이즈음에 독일에서는 함부르크의 베스 메신딕(Bess Mensendieck)과 베를린의 히데 칼마이어(Hede K-allmeyer)에 의하여 스웨덴식 체조가 발전되고 있었습니다. 1925년 독일에서 스웨덴식 체조의 영상물이 출간되면서, 호흡과 동작을 같이하는 이러한 부드러운 형태의 체육이 보다 넓은 대중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조제프는 나치주의(Nazism)로 인해 많은 독일인이 자국을 떠났던 1926년(46세)에 미국으로 이주하였습니다.
당시 독일에서 호신술강사로 유명해지자, 독일육군은 그에게 조교로서 복무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전쟁에 자신의 운동법이 이용되고 싶지 않았던 그는 이주를 결심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가 도피를 결심하였던 또 하나의 이유는 독일인 권투선수 맥스 쉬멜링(Max Schmeling)과의 관계 때문이었습니다. 쉬멜링은 1920년대 초에 권투를 시작하였으며 조제프와 함께 훈련하였다고 합니다. 조제프가 뉴욕에서 자신의 스튜디오를 개업하기 위하여 1926년에 도피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쉬멜링의 매니저가 도와주었고, 쉬멜링은 1927년 라이트헤비급 유럽챔피언 및 1928년 2월에 헤비급 독일챔피언이 된 후 헤비급 세계챔피언이 되기 위하여 미국으로 건너가 조제프와 함께 계속 훈련하여 1932년에 헤비급 세계챔피언이 되었습니다.
조제프는 미국으로 가는 배 위에서 간호사 클라라(Clara)를 만나게 되었으며, 그녀와 결혼하여 뉴욕에서 스튜디오를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조제프는 1929년(49세)에 자신의 운동법을 ‘조절학(Contrology)’이라는 이름으로 하여 뉴욕 8번가 939번지에 스튜디오를 개업하였습니다. 스튜디오를 개업한 직후에 대공황(1929년 10월 24일~1939년)이 오게 되었습니다.
대공황이 스튜디오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자료는 없지만, 조제프는 1934년(54세)에 조절학에 대한 자그마한 첫 저서를 출간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의 건강(Your Health)’이라는 제목의 이 저서에서 건강에 대한 자신의 철학과 생각을 피력하였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결정과 좌절의 순간들을 언급하였으며, 제1차 세계대전 중에 그리고 그 후에 겪은 여러 운명의 순간들을 언급하였습니다. 실제적으로 운동을 기술하지 않았으며, 독자들이 자신의 스튜디오에 회원으로 가입하기를 간곡히 제안하였습니다. 글을 맺으면서 조절학에 대한 자신의 의견과 업적이 당연한 승인도 없이 도용되고 있음에 당황함을 피력하였는데, 이는 오늘날의 필라테스 계에서도 갖고 있는 문제점입니다.
조제프는 이즈음에 자신의 안락의자를 모델로 한 운다 체어(Wunda chair)를 고안하였습니다. 이 기구는 좌업생활양식으로 인하여 자세가 올바르지 못하고 운동이 부족한 현대인을 고려한 것이었습니다.
조제프는 권투, 호신술 등에서 경력을 쌓았지만, 조절학으로써 가장 열정적으로 함께 할 장기적인 분야로 무용계를 선택하였습니다.
조제프는 루스 세인트 데니스(Ruth St. Denis)와 함께 데니스-숀 무용단을 공동 설립한 그녀의 남편 테드 숀과 친분을 쌓았으며, 1930년대 중반에는 종합무용극장 제이콥스 필로우에 있는 무용센터를 발전시키는데 일조하였습니다. 테드는 조제프로부터 다양한 형태의 동작을 받아들였고, 조제프는 이를 바탕으로 매트운동과 실외훈련을 가르쳤습니다.
조제프는 주로 허리와 다리를 다친 무용수들을 무대로 복귀시키는 자신의 능력으로 인하여 무용계에서 매우 좋은 관계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냐 홈(Hanya Holm), 마서 그래이(Martha Graham), 안무가 죠지 밸런신 등이 그를 무용계로 추천하였습니다. 론 플레처주는 마서 그레이엄 무용단 소속의 무용수로서 무릎의 문제로 조절학을 받았으며, 필라테스계로 전업한 유명한 무용수들 중의 한명입니다. 1940년대 말에 이르러서 조제프 는 무용수들 중에서 중요한 고객들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조제프는 1945년(65세)에 그의 두 번째 저서인 ‘조절학을 통한 인생으로의 회귀’를 출간하였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심화된 철학을 피력하였으며, 가정에서 할 수 있는 일련의 34가지 동작 위주로 구성된 매트운동을 사진과 함께 기술하였습니다. 그는 더 이상의 책을 저술하지 않았습니다.
조제프는 클라라와 함께 1920년대 말에서 1960년대까지 미국 뉴욕에서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제자들을 교육하였습니다. 조제프가 시범을 보이고 클라라가 설명을 하며 교육하였다고 합니다.
조제프(1967년 87세)와 클라라(1977년 95세)가 타계할 때까지 2권의 책과 몇 개의 영상물만이 출간된 이유는, 그들은 생전에 교육방식으로서 공식적 교육과정을 두지 않고 비공식적 교육과정인 도제방식 위주로 도제들에게 조절학을 전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도제들 역시 도제방식으로 다음 도제들에게 조절학을 전수하였습니다.
조절학의 공식적인 보급은 그들의 사후인 1980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시작으로서 1980년에 필립 프리드먼과 게일 아이젠이 공저한 ‘신체와 정신의 조절을 위한 필라테스(The Pilates Method of Mental and Physical Conditioning)’가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조절학’은 ‘필라테스(Pilates method, Pilates method of exercise, cf. pilates)'로, 신체운동중심인 ‘파워하우스’는 ‘센터’로 명시되었으며, 조제프의 철학과 원리가 명확하게 요약되었습니다.
뒤이어 전 세계에 있던 다수의 필라테스 협회들과 강사들이 교육의 시간이나 양질 및 심도면에서 각자 다양한 공식적 교육과정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무용계에만 알려져 있던 필라테스는 1980년대 중반부터 무용계 밖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여 최근 급속히 대중화 되면서 그 무명의 굴레를 벗게 되었습니다.
조제프는 자신의 운동법에 대하여 매우 소유욕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스튜디오 내에서 자신이배출한 강사들에게 회원을 맡기기를 꺼려하였으며, 자신이 유일한 도장인 이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는 도제방식으로 자신의 보조자를 양성하였던 것입니다.
조제프의 초기 도제들은 그를 떠나서 자신들 소유의 스튜디오를 개업하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론 플레처, 캐롤라 트라이어 등의 초기 도제들은 로매나 크라이자노브스카 등의 후기 도제들과 함께 조제프의 곁을 지켰습니다. 초기 도제였던 이브 젠트리는 조제프의 곁을 떠나 무용계에 전념하였다가 다시 필라테스로 복귀하였는데, 이 때 몇몇 전통 필라테스의 원리에 새롭게 접근하여 매우 부드럽고 조직화된 방식의 예비 필라테스(초급필라테스, pre-Pilates)를 고안하였습니다.
초기 도제들 중에서 어떤 이들은 조제프의 운동법을 자신들의 방법과 통합하였고, 어떤 이들은 가끔 전통원리를 이해하지도 않은 채 그의 운동법 중 몇 개만을 취하여 자신들만의 형태로 발전시키면서도 ‘필라테스’의 이름을 도용하였습니다. 당연히 각자 서로 다르게 필라테스를 이해하게 되었으며, 인체에 대하여 발전된 보다 나은 새로운 이해를 통하여 각자 필라테스를 미묘하게 변화시켜 이해하거나, 20세기 초부터 발전된 많은 새로운 동작형태를 통하여 각자 서로 다르게 필라테스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조제프는 타계할 즈음에는 (1967년 87세) 그의 운동법을 기초로 한 다수의 스튜디오가 개업을 하여 뒤이은 미국 무용계의 수요를 충족시켜 주었습니다. 클라라는 조제프가 타계할 때까지 그를 도와 일하였으며, 그가 타계한 후에도 자신이 타계할 때까지(1977년 95세) 그의 도제들과 함께 스튜디오를 운영하였습니다.
2. 피넬러피 레이티(Penelope Latey)
피넬러피는 1970년대 말에 영국의 런던에서 런던현대무용단(The London Contemporary Dance Company)이 설립한 종합무용극장 The Place의 런던현대무용학교에서 수업을 받던 중, 발레를 연습하던 초년시절의 다양한 부상으로 인하여 수업을 받는데 차질이 생겼고, 허리의 근력을 강화시키고 유연성을 개선시키고자 더 플레이스의 지하층에서 있던 필라테스 스튜디오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스튜디오는 런던현대무용학교 무용수 출신의 앨런 헐먼(Alan Herdman)이 1960년대 말에 미국 뉴욕에서 캐롤라 트라이어에게서 도제수업을 받은 후 1970년대 초에 영국 런던으로 돌아와 필라테스를 운영하던 곳이었습니다. 또한 램버트발레단 발레리노 출신의 드레아스 레이넥(Dreas Reyneke)이 헐먼의 첫 도제로서 필라테스를 강습하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이 스튜디오에서는 더 플레이스에 소속된 무용수들이 기술적인 결함을 해결하거나 부상을 관리하기 위하여정기적으로 필라테스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스튜디오에는 피넬러피에게 매우 낯선 기구들이 작고 눅눅한 공간 안에 다닥다닥 채워져 있었으며, 빛이라고는 포장도로 밖으로 내어진 창문으로 들어오는 자연광이 전부였습니다.
피네러피에게 필라테스는 처음에 매우 힘든 운동이었지만, 그녀는 특정한 근육의 불균형이 교정 되어가는 자신의 몸을 생각하면서 필라테스를 즐겼습니다. 또한 부상을 당하였을 때에도 운동을 계속할 정도로 필라테스를 즐겼습니다.
피넬러피가 필라테스를 시작할 즈음에, 레니넥이 노팅 힐 게이트(Notting Hill Gate)에 자신의 스튜디오를 개업하기 위하여 사직하였으며, 고든 톰슨(Gordon Thomson)이 보조강사로 대신 부임하였습니다.
피넬러피는 1980년대 초에 건강 상의 이유로 무용을 그만두게 되었지만, 레이넥과의 교류로 노팅 힐 게이트에 있던 그의 ‘드레아스 인체조절 스튜디오(Drea's Body Conditioning Studio)에서 필라테스를 계속 접할 수 있었습니다. 레이넥은 이 스튜디오에서 필라테스를 자신의 방식으로 발전시키고 있었습니다.
레이넥은 매우 조용하면서도 태도가 명확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그의 영향과 추천으로 피넬러피는 필라테피 강사로 진로를 정하게 되었습니다.
피넬러피는 첫 출산을 할 때까지 이 격렬한 운동을 계속 하였습니다. 임신으로 몸이 불어났을 때에도 격렬하게 운동하였는데 복근이 전혀 팽창되지 않으면서 고생을 하였으며, 출산 후 요실금까지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피넬러피는 복부를 항상 긴장시킨 상태에서 극단적으로 격렬한 동작을 극단적인 범위로 운동하는 전통 필라테스가 정예 무용수와 운동선수에게는 매우 알맞은 운동이지만 일반인의 건강과는 초점이 맞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러한 생각에 맞춰 필라테스를 수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호흡 시에 복부와 허리를 항상 긴장시켜 납작하게 만드는 것을 완화하였으며, 신체운동중심(powerhouse, center, core)을 하부늑골에서 골반기저까지 연장하였습니다. 출산 후의 요실금과 족부의 가족병력을 경험하였기에, 골반기저부와 족부의 운동도 포함시켰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이러한 수정을 기초로 하여 임산부와 출산 후의 여성을 위한 매트운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녀는 점차적으로 필라테스를 자신의 방식으로 변화시켜 오늘날의 개작 모던 필라테스(Morden Pilates)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피넬러피는 1988년에 가족과 함께 호주로 이주하였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아 1년 이상 필라테스를 강습하지 못하다가, 1989년부터 요가센터에서 기초 매트운동을 강습하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전문 발레학교에서 고급 필라테스를 강습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얼마 되지 않아 자그마한 스튜디오를 개업할 수 있었고, 또한 건강관리계에서 선도자가 되었습니다.
피넬러피는 레이넥에게서 받은 도제교육 및 그와의 토론은 통하여 이룬 자신의 필라테스가 매우 견실하다고 생각을 하였지만, 인체에 대하여 보다 나은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해부학, 생리학, 마사지 등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영국식 필라테스를 개작한 자신의 필라테스를 10년 이상 가르쳐 왔을 때, 필라테스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다른 강사들의 견해를 답습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여 1993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피넬러피는 1994년 메건 윌리엄스(Megan Williams)가 조직한 소규모의 호주 필라테스 강사모임과 회합을 가진 후, 호주에서 처음으로 독립적인 필라테스 강사협회를 발족하는데 일조하게 되었습니다. 1996년에 호주필라테스협회의 초대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999년에 퇴임하였습니다.
피넬러피는 고전무용과 현대무용 양자의 경력을 가지고 있으며, 무용과 필라테스에 각자 오랜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22년 이상 필라테스를 운동 하여왔고, 20년 이상 필라테스를 강습하여 왔으며, 1992년부터 필라테스를 교육하여 왔습니다.
피넬러피는 현재 호주의 세인트 레너즈(St. Leonards)에서 스튜디오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고, 호주필라테스협회에서 시험관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시드니 공과대학교(University of Technology Sydney, UTS)대학원에서 교육과정진행위원이자 상급전임강사로서 필라테스 수료과정을 진행하며 필라테스의 직업적 발전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피넬러비는 정기적으로 필라테스를 교육하면서 해부학을 계속 공부하고 있습니다. 모던 필라테스는 동작 해부학을 바탕으로 하는 기능 운동학에 굳건한 기초를 둡니다. 신체동작에 대한 연속적이고 예리한 분석에 기초를 둡니다.
피넬러피는 가끔 현대무용을 강의하기도 하며, 다른 분야에서 발전된 동작을 연구하여 뒤쳐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남편이자 정골의사인 필(Pill)로부터 많은 영향과 도움을 받습니다. 그도 런던에서 레이넥으로부터 다소의 필라테스를 배웠습니다.
피넬러피는 그동안 현대무용, 부토(Butoh, 1950년대에 발전된 일본식 행위예술), 치료적 마사지(therapeuticmassage), 정골의학(osteopathy), 펠텐크라이스(Feldenkrais method), 산전 및 산후 관리, 재활 그리고 모던필라테스의 동료들, 회원들과의 상담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모던 필라테스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모던 필라테스는 무용수, 운동선수 외에 모든 연령층의 일반인, 임산부, 환자에게도 적절하게 사용되어집니다.
모던 필라테스는 표층에서 심층에 이르는 근육의 고른 발달, 체력 및 활력의 향상, 기술 및 경기력의 향상, 부상의 예방, 몸매의 관리 등의 효과를 위한 건강증진(fitness)과 부상 후의 관리, 수술 후의 관리, 산후의 관리, 노인의 근육 및 관절 운동성의 유지, 자세의 교정 등의 효과를 위한 재활(rehabilitation)에 사용되어집니다.
주] 필라테스 연맹의 필라테스 원로(The Pilates Elders of PMA)
필라테스 연맹에서 선정한 필라테스계의 원로들로서, 조제프와 클라라의 직계 도제 5명을 말합니다. 론플레처, 메리 보우인, 캐시 그랜트, 롤리타 샌 미구엘, 메리 필라테스 르리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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